해당화延世韩国语语什么意思?

그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였습니다.
[한국
애송시
100편]
전라도
가시내(È)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시
'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5~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정끝별·시인
입력 :
수정 :
조선일보
& Chosun.com&&
6은 나무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첫번째는
자동차
3은 늑대,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돌고래
비행기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자동차,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비행기,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열번째는
전화기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46)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관계는
무연하고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나무이고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기도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정끝별·시인
입력 :
조선일보
& Chosun.com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56)
시인의
시 '손을
씻는다'를
함께
읽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라고
쓴 시. 한
점 오점
없이 살
수는
없다.
저질러가면서
우리는
산다.
좌충우돌하면서
난동을
부리면서.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시대가
진화해가는
것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가진
자기
반성과
좀 더
나아지려는
희망의
추구
같은 것
때문이다.
이 시는
솔직하다.
나무는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헐벗고
무방비이고,
때로는
벌 받고,
긴가민가
하는
사람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중얼할
줄은
아는
사람이다.
아주
숙맥이거나
속물적이지는
않아서
현재의
환멸을
볼 줄은
아는,
앙가슴이
뛰는
그런
사람.
바깥
세상이
영하인지
영상인지
구별할
줄 알아
드디어
버틸
줄도
거부할
줄도
알게 된
사람.
마침내
싹도
잎도
틔우면서
불쑥
기립하여
봄의
나무가
된 사람.
자력의
운동성을
가진,
스스로를
혁명하는
사람.
자기
몸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는
새 같은
사람.
의지의
사람…
우리는
이런
봄나무를
기다리는
아닌가.
황지우
시인은
;대를
날카로운
풍자로
노래했다.
그는
;대의
독재와
살해와
검열에
맞선
'시의
시국사범'이었다.
대담에서
;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시대가
우리를
건드렸다"고
표현했는데,
그의
시는
권력의
중증(重症)을
처절하게
해체하려한
양심이었다.
설령
그가 시
'뼈아픈
후회'에서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있지만,
혹독한
자기
검열의
고백이
황지우
시의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대와의
불화와
선적(禪的)인
기개를
넘나드는
그의
시는
한국시사에서
푸릇푸릇한
'방풍(防風)의
대밭'이다.
문태준·시인
입력 :
수정 :
조선일보
& Chosun.com&&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얼마나
더 작게,
가볍게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우주가
조용하였겠습니다.
(〈2006〉)
해방둥이
문인수(62)
시인은
마흔이
넘어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하지만
시적
성취는
어느
시인보다
높아
환갑
지나
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시는
정진규
시인의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선친에
대한
회고담을
듣고
쓰인
시인데,
바야흐로
문인수
시인의
대표시가
되었다.
문상을
다녀와
순식간에
쓰였을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막힘이
없이
활달하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뉘고
있다.
정신은
아직
초롱한
아버지가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떠나버린
스스로의
몸에
난감해
하실까봐
아들이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며
농 반
어리광
반을
부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모습은
흐뭇하고
뭉클하다.
이 '쉬'는
단음절인데
그 뜻은
다의적이어서
여운을
남긴다.
일차적으로는
오줌을
누시라는
말이겠고,
그것도
쉬이(쉽게)
누시라는
말이겠고,
아버지가
힘겹게
오줌을
누시는
중이니
우주로
하여금
조용히
하라는
말이겠다.
아버지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해
내는
울력의
소리이자
당부의
소리이고
주술의
소리일
것이다.
오줌발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압권이다.
계산해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이
평생 눈
오줌발을
잇고
잇는다면
지구 한
바퀴쯤은
돌 수
있지
않을까.
그 길고
뜨신
오줌발이야말로
생명의
끈이고
욕망의
끈이다.
그 '길고
긴 뜨신
끈'을
늙은
아들은
안타깝게
땅에
붙들어
매려
하고 더
늙으신
아버지는
이제
힘겨워
땅으로부터마저
풀려
한다.
아들은
온몸에
사무쳐
갚아드리듯'
아버지를
안고,
안긴
아버지는
온몸을
더 작게
가볍게
움츠리려
애쓴다.
안기고
안은
늙은 두
부자의
대조적인
내면이
시를
더욱
깊게
한다.
마지막
행의
'쉬!'는 첫
행의
'상가(喪家)'를
환기시킨다.
이제
아들의
소리도,
툭 툭
끊기던
아버지의
오줌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길고
긴 뜨신
오줌발'도
쉬!,
이렇게
조용히
끊기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시가
뭘까'
라는
고민을
할 때
이런
시는
쉬운
답을
주기도
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한순간에
집약시키는
것, 그
순간에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통찰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이 시가
그러하지
않는가.
정끝별·시인
입력 :
수정 :
조선일보
& Chosun.com&&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었네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는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주저앉을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서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흔하게도
인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우리는
흘러가면서
만난다.
사람과
붐비는
시장과
웃음과
꽃밭과
폭풍의
바다와
벼랑과
사막을
만난다.
그러므로
삶에는
여독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여행의
종착지를
생각한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적적한
곳으로
데려간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가서
살자고
한다.
종일을
살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개옻
그늘과
늦가을만이
살고
있는 곳.
세상의
쓸쓸함을
살아본
듯 벌써
무욕을
알고,
골짜기보다
더 깊은
눈으로
속리(俗離)한
우리를
맞아줄
여인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그런
곳이
있을까.
잇속이나
명리나
부귀
같은
것은
손을 털
듯 탁, 탁
털어버린
곳. 더
움켜쥐려는
근욕(根欲)이
사라져
알몸의
자아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
퇴폐도
맑게
씻기어서
별처럼
빛나는
곳. 삶을
탕진한
사람도
받아줄
것 같은
마지막
성지(聖地).
그곳서
우리의
여행이
끝난다면
후회는
없으리니.
많은
독자들은
김명인(62)
시인의
첫 시집
'동두천(東豆川)'을
기억할
것이다.
기지촌에서
혼혈아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기의
경험을
동두천
연작은
사회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동두천
4')라고 써
수많은
독자를
여지없이
울먹이게
한 시!
김명인
시인은
동두천
연작
발표
후에도
지금까지
'욕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막막한
표랑을
강한
연민으로
감싸
안아온
시인이다.
그는
한국의
서정시가
실험과
해체와
생각의
과잉과
포즈의
유행을
때에도
흔들림
없이
서정시를
지켜내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아
왔다.
그의시에
대해
이승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마디로
김명인의
시는
마음이
놓인다"라고.
동감이다.
문태준·시인
입력 :
조선일보
& Chosun.com&&}

我要回帖

更多关于 性冷淡韩国语在线观看 的文章

更多推荐

版权声明:文章内容来源于网络,版权归原作者所有,如有侵权请点击这里与我们联系,我们将及时删除。

点击添加站长微信